[커버스토리] 범람하는 학회, 실속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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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범람하는 학회, 실속이 없다
500개 이상 난립, 불합리 많아
통폐합 통해 효율성 높여야
“매일 매일 짐 싸는 게 일입니다”
모 제약사 PM 김 모 과장은 10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사무실 자리에 앉을 시간이 없어졌다. 일정을 체크할 때마다 한숨이 앞서는 김 과장은 연이은 출장에 매일 매일 짐 싸는 게 일상이 됐다. 김 과장은 11월까지는 여유를 가질 틈이 전혀 없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모 의대 정형외과의 최 모 레지던트는 10월 내내 학회장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담당 교수들이 각기 다른 학회의 임원을 맡고 있는 터라 이곳저곳에서 발표하랴 잡일하랴 녹초가 될 지경이다.
가을은 학술대회의 시즌이다. 9월부터 시작된 시즌은 11월 하순이 돼야 끝난다. 전국 곳곳에서 수없이 열리는 학회들, 모두가 알맹이 있는 학회일까?
국내 의학계에서 ‘학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단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두 몇 개인지 정확히 파악조차 하기 어렵고, 그 많은 학회들이 각각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같은 주제를 다루며 이름까지 흡사한 학회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생기고 있다.
의학회 소속 학회만 132개
대한의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학회만 해도 2003년 현재 132개에 이르고 있다. 지난 66년 대한의학회가 32개의 회원학회로 시작한 것에 비하면 숫자가 상당히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증가는 오랜 시간에 걸쳐 꾸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90년대를 기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의학회는 80년도부터 준회원학회를 받기 시작했으며 지난 2001년 정회원학회와 준회원학회를 통합했다. 통합 당시 전체 회원학회 수는 121개. 이들 학회의 경우 지속적인 학술활동이 입증돼 회원학회로 등록돼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질적인 향상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학회는 이것뿐이 아니다. 의학회에 속해 있지 않은 학회는 훨씬 많기 때문이다. 대학의학회 조사에 따르면 현재 회원학회로 등록되지 않은 학회는 무려 400여 개가 넘는다. ‘자고 나면 학회가 하나 더 생긴다’는 말이 완전히 우스개는 아닌 셈이다.
이들 학회의 상당수는 매우 좁은 분야를 다룬다. 여성, 노인, 청소년, 소아 등 연령층에 따른 구분은 일반화된 지 오래됐으며, 같은 주제임에도 불구, 각 과별로도 학회가 별도로 세분화돼 운영되기도 한다. 또한 최근에는 질환별 학회가 늘어나는 것도 특징이다. 질환별로 세분화된 학회의 경우 뚜렷한 과별 구분이 없으며, 각 학회마다 같은 질환에 대해 조금씩 다른 접근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는?
최근 들어 급격하게 학회가 늘어난 이유에 대해 의학계 관계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학문의 깊이를 위해서는 과별로 세분화된 학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명예욕이나 대학별 주도권 싸움 등에 따른 학회 설립도 흔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상당수 학회가 비슷한 분야의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명칭까지 거의 같은 경우도 많다. 실제 ‘대한’, ‘한국’ 다음에는 같은 이름이거나, 앞부분은 똑같지만 ‘학회’와 ‘연구회’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사례는 흔하다. 또한 국내의 경제적, 사회적 특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미국에 있는 학회라면 거의 무조건 우리나라에 설립되는 경향도 있다.
이밖에도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회는 의대 교수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최근 들어 개원가를 중심으로 한 학회나 연구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도 학회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의학계 한 관계자는 학회가 세분화되는 것은 보다 효과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라면서도, 모(母)학회와 연관되지 않고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 관계자는 또 개원의들이 학회를 설립하는 경향은 ‘자구책 마련’의 의미가 크다며 이는 그동안 기존 학회에서 개원의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부족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특히 최근 들어 벌어진 의대 교수들 위주의 소화기내시경학회와 개원의들이 주도하는 위장내시경학회간의 대립, 비만치료제를 놓고 논란이 된 비만학회와 개원가간의 대립은 이같은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부작용 적지 않아
학회가 늘어나면서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적지 않은 부작용도 눈에 띈다. 우선 긍정적인 부분은 각 질환별로 학회가 세분화되면서 질환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이 있으며, 또한 타 과와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점도 있다. 대한자기공명의과학회의 경우 방사선과 교수들과 물리학자들이 함께 학회를 운영하고 연구활동을 벌임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많은데, 대표적인 것은 학회가 계속해서 세분화됨에 따라 모학회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이른바 학회의 공동화현상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 사람이 너무 많은 학회에 소속되다보니 학술활동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경향도 있다. 각 학회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학술대회 일정을 잡는 통에 일부 의사들은 ‘가을에는 학회 참석하다가 시간 다 보낸다’는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다. 지나치게 세분화되는 학회가 오히려 학술연구를 위한 집중도 면에서는 독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학회간 불신이 만연해지는 점이 손꼽힌다. 의학계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가 학연에 따른 그룹화를 들 수 있는데, 출신학교별로 그룹을 만들어 학회를 설립하는 것도 학술활동의 전반적인 발전에 저해요소로 손꼽히고 있다.
심지어 일부 교수들은 특정 학회에 대해 “기존 학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이 만든 친목회”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재정은 부족하고 스폰서는 한계가 있다
학회를 운영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재정적인 부분인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학회로 인해 학회의 재정자립도는 천차만별이다. 많은 의사들이 모학회를 비롯 세분화된 학회의 여러 곳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실제 회비납부율은 매우 저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스폰서를 구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재정적 어려움은 대다수의 학회들이 겪고 있는 문제다. 특히 소규모학회나 제약사와 관계가 밀접하지 않은 분야의 학회들은 그 어려움이 더 크며, 분과학회들은 호황을 누리는 반면 모학회가 기본적 운영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제약사의 마케팅이 집중되고 있는 내과 관련 학회들의 사정이 가장 좋은 편이다. 특히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순환기 관련 학회나 내분비 관련 학회는 제약회사간 스폰서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반면 제약사의 스폰서를 거의 얻지 못하는 학회도 많다.
일례로 11월 초에 추계학술대회가 열리는 모 학회의 경우 25개의 부스를 선착순 배정했는데, 뒤늦게 신청한 제약사들은 부스를 얻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학회를 열지 못할 만큼 재정적으로 열악한 학회들도 적지 않다.
타겟 마케팅은 장점, 절대비용 상승은 어려움
제약회사들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세분화된 학회에 따라 제품에 맞는 타겟 마케팅이 가능해졌다는 점과 학술활동의 깊이가 깊어질 수 있다는 점, 대국민 홍보가 용이해졌다는 점 등의 장점이 손꼽히고 있지만, 문제는 역시 비용이다.
학회가 많아짐으로 인한 마케팅 비용과 관련 인력 인건비 등이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회장이나 일부 임원의 개인적 영향력 때문에 별로 연관성이 없는 학회에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후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고백한다.
또한 각 제약사들은 올해보다 내년이 더욱 걱정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경기침체의 여파로 인해 올해 매출이 바닥을 쳤고, 그로 인해 내년 마케팅 예산이 대부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각 학회들의 스폰서 구하기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고하는 대목이다.
한편, 제약사들은 부스비용에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학회마다 부스배정비용이 천차만별이라며, 적정한 기준이 마련되기를 희망하는 업체들이 많다.
학회 구조조정 및 내실화 중요
학회의 난립으로 인한 부작용들이 생기자, 학회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대안으로 모학회를 중심으로 한 통합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우선 세부학회들이 모학회를 중심으로 한 통합학술대회를 개최하거나 성격이 비슷한 학회간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실제로 소화기내과의 경우 세분화된 학회의 추계학술대회를 공동으로 준비, 함께 학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회원들의 불편을 없애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회원들의 관심분야가 다른 점을 고려, 각 분과 학회별로 주제별 발표 시간대를 달리함으로써 다양한 내용을 접할 수 있게 한 점도 장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세분화된 학회가 모학회의 연구회 개념으로 결합하는 것이 학회간 시너지효과를 올리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우선 회원들의 혼란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탄탄한 인적구성을 중심으로 연구회를 통한 연구가 더욱 효과적이고 알차게 진행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그동안 개별적으로 학술대회를 진행하거나 책자를 발행해 왔던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의학회 한 관계자는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학회가 늘어나는 것을 과도기적 현상으로 판단한다며, 결국 주요 학회를 중심으로 통합하거나 모학회의 연구회 개념으로 함께 나아가는 형태로 변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한편, 학회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는 기존 학술대회 운영방식에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행 춘·추계로 나눠져 있는 학술대회를 미국, 유럽처럼 연간 1회로 줄이는 대신 2박 3일 정도의 일정으로 진행할 경우 질적인 측면이나 회원들의 만족도 면에서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수년 전부터 1년에 한번 2박 3일간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진단방사선학회의 경우 횟수를 줄여서 학술대회의 질적 향상에 노력한 결과 올해의 경우 학회의 특성에 맞는 전자포스터가 등장한 것을 비롯, 연구논문의 질적 향상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 학회들은 우리 의학의 발전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한 대승적 차원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곽상희 기자
opensky@fromdoctor.com |+ 목록보기 |
500개 이상 난립, 불합리 많아
통폐합 통해 효율성 높여야
“매일 매일 짐 싸는 게 일입니다”
모 제약사 PM 김 모 과장은 10월에 접어들면서부터 사무실 자리에 앉을 시간이 없어졌다. 일정을 체크할 때마다 한숨이 앞서는 김 과장은 연이은 출장에 매일 매일 짐 싸는 게 일상이 됐다. 김 과장은 11월까지는 여유를 가질 틈이 전혀 없다며 볼멘소리를 한다.
모 의대 정형외과의 최 모 레지던트는 10월 내내 학회장을 다니느라 정신이 없다. 담당 교수들이 각기 다른 학회의 임원을 맡고 있는 터라 이곳저곳에서 발표하랴 잡일하랴 녹초가 될 지경이다.
가을은 학술대회의 시즌이다. 9월부터 시작된 시즌은 11월 하순이 돼야 끝난다. 전국 곳곳에서 수없이 열리는 학회들, 모두가 알맹이 있는 학회일까?
국내 의학계에서 ‘학회’라는 이름으로 존재하는 단체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모두 몇 개인지 정확히 파악조차 하기 어렵고, 그 많은 학회들이 각각 어떤 활동을 하고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같은 주제를 다루며 이름까지 흡사한 학회들은 지금도 계속해서 생기고 있다.
의학회 소속 학회만 132개
대한의학회에 소속되어 있는 학회만 해도 2003년 현재 132개에 이르고 있다. 지난 66년 대한의학회가 32개의 회원학회로 시작한 것에 비하면 숫자가 상당히 늘어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증가는 오랜 시간에 걸쳐 꾸준히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지난 90년대를 기점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대한의학회는 80년도부터 준회원학회를 받기 시작했으며 지난 2001년 정회원학회와 준회원학회를 통합했다. 통합 당시 전체 회원학회 수는 121개. 이들 학회의 경우 지속적인 학술활동이 입증돼 회원학회로 등록돼 있다는 점에서 연구의 질적인 향상을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학회는 이것뿐이 아니다. 의학회에 속해 있지 않은 학회는 훨씬 많기 때문이다. 대학의학회 조사에 따르면 현재 회원학회로 등록되지 않은 학회는 무려 400여 개가 넘는다. ‘자고 나면 학회가 하나 더 생긴다’는 말이 완전히 우스개는 아닌 셈이다.
이들 학회의 상당수는 매우 좁은 분야를 다룬다. 여성, 노인, 청소년, 소아 등 연령층에 따른 구분은 일반화된 지 오래됐으며, 같은 주제임에도 불구, 각 과별로도 학회가 별도로 세분화돼 운영되기도 한다. 또한 최근에는 질환별 학회가 늘어나는 것도 특징이다. 질환별로 세분화된 학회의 경우 뚜렷한 과별 구분이 없으며, 각 학회마다 같은 질환에 대해 조금씩 다른 접근을 시도하는 경우도 많다.
급격하게 늘어난 이유는?
최근 들어 급격하게 학회가 늘어난 이유에 대해 의학계 관계자들은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고 있다.
학문의 깊이를 위해서는 과별로 세분화된 학회가 필요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긴 하지만, 개인적인 명예욕이나 대학별 주도권 싸움 등에 따른 학회 설립도 흔하다는 지적도 있다. 실제로 상당수 학회가 비슷한 분야의 학술연구를 목적으로 존재하고 있으며, 명칭까지 거의 같은 경우도 많다. 실제 ‘대한’, ‘한국’ 다음에는 같은 이름이거나, 앞부분은 똑같지만 ‘학회’와 ‘연구회’가 따로따로 존재하는 사례는 흔하다. 또한 국내의 경제적, 사회적 특징을 고려하지 않은 채 미국에 있는 학회라면 거의 무조건 우리나라에 설립되는 경향도 있다.
이밖에도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학회는 의대 교수들의 전유물이었지만 최근 들어 개원가를 중심으로 한 학회나 연구회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는 것도 학회가 늘어나고 있는 이유 중의 하나로 볼 수 있다.
의학계 한 관계자는 학회가 세분화되는 것은 보다 효과적인 연구를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이라면서도, 모(母)학회와 연관되지 않고서는 오히려 역효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계했다.
이 관계자는 또 개원의들이 학회를 설립하는 경향은 ‘자구책 마련’의 의미가 크다며 이는 그동안 기존 학회에서 개원의들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이 부족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고 풀이했다.
특히 최근 들어 벌어진 의대 교수들 위주의 소화기내시경학회와 개원의들이 주도하는 위장내시경학회간의 대립, 비만치료제를 놓고 논란이 된 비만학회와 개원가간의 대립은 이같은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
부작용 적지 않아
학회가 늘어나면서 긍정적인 점도 있지만 적지 않은 부작용도 눈에 띈다. 우선 긍정적인 부분은 각 질환별로 학회가 세분화되면서 질환에 대한 집중적인 연구가 가능하다는 점이 있으며, 또한 타 과와의 연계를 통해 새로운 분야를 개척하는 점도 있다. 대한자기공명의과학회의 경우 방사선과 교수들과 물리학자들이 함께 학회를 운영하고 연구활동을 벌임으로써 상당한 성과를 올리고 있기도 하다.
하지만 부정적인 측면도 많은데, 대표적인 것은 학회가 계속해서 세분화됨에 따라 모학회의 위상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이른바 학회의 공동화현상을 낳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한 사람이 너무 많은 학회에 소속되다보니 학술활동의 집중도가 떨어지는 경향도 있다. 각 학회마다 서로 다른 날짜에 학술대회 일정을 잡는 통에 일부 의사들은 ‘가을에는 학회 참석하다가 시간 다 보낸다’는 푸념을 늘어놓을 정도다. 지나치게 세분화되는 학회가 오히려 학술연구를 위한 집중도 면에서는 독이 되고 있는 셈이다.
그보다 더 심각한 문제는 학회간 불신이 만연해지는 점이 손꼽힌다. 의학계의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되고 있는 부분 중의 하나가 학연에 따른 그룹화를 들 수 있는데, 출신학교별로 그룹을 만들어 학회를 설립하는 것도 학술활동의 전반적인 발전에 저해요소로 손꼽히고 있다.
심지어 일부 교수들은 특정 학회에 대해 “기존 학회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는 몇몇 사람들이 만든 친목회”라고 원색적으로 비난하기도 했다.
재정은 부족하고 스폰서는 한계가 있다
학회를 운영함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재정적인 부분인데,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학회로 인해 학회의 재정자립도는 천차만별이다. 많은 의사들이 모학회를 비롯 세분화된 학회의 여러 곳에 이름을 올리고 있어 실제 회비납부율은 매우 저조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물론 스폰서를 구하는 데도 어려움을 겪고 있다.
현재 재정적 어려움은 대다수의 학회들이 겪고 있는 문제다. 특히 소규모학회나 제약사와 관계가 밀접하지 않은 분야의 학회들은 그 어려움이 더 크며, 분과학회들은 호황을 누리는 반면 모학회가 기본적 운영비를 마련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일반적으로 제약사의 마케팅이 집중되고 있는 내과 관련 학회들의 사정이 가장 좋은 편이다. 특히 최근 각광을 받고 있는 순환기 관련 학회나 내분비 관련 학회는 제약회사간 스폰서 경쟁이 벌어지기도 한다. 반면 제약사의 스폰서를 거의 얻지 못하는 학회도 많다.
일례로 11월 초에 추계학술대회가 열리는 모 학회의 경우 25개의 부스를 선착순 배정했는데, 뒤늦게 신청한 제약사들은 부스를 얻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른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학회를 열지 못할 만큼 재정적으로 열악한 학회들도 적지 않다.
타겟 마케팅은 장점, 절대비용 상승은 어려움
제약회사들도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세분화된 학회에 따라 제품에 맞는 타겟 마케팅이 가능해졌다는 점과 학술활동의 깊이가 깊어질 수 있다는 점, 대국민 홍보가 용이해졌다는 점 등의 장점이 손꼽히고 있지만, 문제는 역시 비용이다.
학회가 많아짐으로 인한 마케팅 비용과 관련 인력 인건비 등이 크게 증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학회장이나 일부 임원의 개인적 영향력 때문에 별로 연관성이 없는 학회에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후원을 해야 하는 경우도 있다고 고백한다.
또한 각 제약사들은 올해보다 내년이 더욱 걱정이라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경기침체의 여파로 인해 올해 매출이 바닥을 쳤고, 그로 인해 내년 마케팅 예산이 대부분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각 학회들의 스폰서 구하기 경쟁이 더욱 치열해질 것으로 예고하는 대목이다.
한편, 제약사들은 부스비용에 대해서도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학회마다 부스배정비용이 천차만별이라며, 적정한 기준이 마련되기를 희망하는 업체들이 많다.
학회 구조조정 및 내실화 중요
학회의 난립으로 인한 부작용들이 생기자, 학회의 효율적인 운영을 위한 대안으로 모학회를 중심으로 한 통합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우선 세부학회들이 모학회를 중심으로 한 통합학술대회를 개최하거나 성격이 비슷한 학회간 공동으로 학술대회를 진행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실제로 소화기내과의 경우 세분화된 학회의 추계학술대회를 공동으로 준비, 함께 학술대회를 개최함으로써 회원들의 불편을 없애 호평을 받고 있다. 특히 회원들의 관심분야가 다른 점을 고려, 각 분과 학회별로 주제별 발표 시간대를 달리함으로써 다양한 내용을 접할 수 있게 한 점도 장점으로 손꼽히고 있다.
장기적으로는 세분화된 학회가 모학회의 연구회 개념으로 결합하는 것이 학회간 시너지효과를 올리는 데 효과적일 것이라는 의견도 제시되고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우선 회원들의 혼란을 막을 수 있을 뿐 아니라 탄탄한 인적구성을 중심으로 연구회를 통한 연구가 더욱 효과적이고 알차게 진행될 수 있다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특히 재정적인 측면에서도 그동안 개별적으로 학술대회를 진행하거나 책자를 발행해 왔던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다는 점에서 대안으로 평가받고 있다.
의학회 한 관계자는 최근 기하급수적으로 학회가 늘어나는 것을 과도기적 현상으로 판단한다며, 결국 주요 학회를 중심으로 통합하거나 모학회의 연구회 개념으로 함께 나아가는 형태로 변하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한편, 학회의 내실을 기하기 위해서는 기존 학술대회 운영방식에도 변화를 주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 현행 춘·추계로 나눠져 있는 학술대회를 미국, 유럽처럼 연간 1회로 줄이는 대신 2박 3일 정도의 일정으로 진행할 경우 질적인 측면이나 회원들의 만족도 면에서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수년 전부터 1년에 한번 2박 3일간 학술대회를 개최하는 진단방사선학회의 경우 횟수를 줄여서 학술대회의 질적 향상에 노력한 결과 올해의 경우 학회의 특성에 맞는 전자포스터가 등장한 것을 비롯, 연구논문의 질적 향상도 가져왔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러 학회들은 우리 의학의 발전에 있어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그러한 대승적 차원의 목적에 부합할 수 있도록 ‘교통정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곽상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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