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혀진 6人 누구 책임인가” 서해교전 당시 군의관의 글 감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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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진 6人 누구 책임인가” 서해교전 당시 군의관의 글 감동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 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와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지난해 6월 29일에 발생한 ‘서해교전’ 1주년을 맞아 당시 부상장병들을 치료하며 그들을 옆에서 지켜봤던 한 군의관의 회고가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이 글은 읽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넘어 진한 아픔을 남기고 있다. 무엇을 주장하거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 아니라 당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마치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써내려간 이 글은 애국과 국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우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아픈 글이 되고 있다.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서해교전 부상 장병들을 치료한 이봉기(李鳳基·34)씨가 쓴 ‘서해교전…어느 군의관의 소고(小考)’라는 제목의 이 글은 원고지 30장 분량의 글이다. 이씨는 올 4월 전역해 현재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임상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다.
‘오 중사의 맞은편 침상에서 생존자 중 가장 많이 다친 박동혁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 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포탄을 맞아 왼쪽 발목을 절단한 부정장 이희완 중위 설명으로는 의무병이었던 박 상병은 여기저기에서 쓰러져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니다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돼 그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씨의 이 글은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지만 삶은 계속되며 여전히 아름답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의료전문지인 ‘청년의사’가 주최하는 ‘한미수필문학상’에서 장려상에 뽑힌 이씨의 글은 4월 청년의사 홈페이지에 처음 소개됐다.
이씨는 “올 2월쯤인가 청년의사 홈페이지에서 문학상을 개최한다는 광고를 봤는데 소재가 ‘환자와의 관계에서 가장 생각나는 일’로 돼 있어서 내 생애 평생 잊지 못할 당시 경험을 썼다”고 말했다.
서해교전 1주년을 앞둔 22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이씨는 파란 수술복 차림으로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다. 서해교전 1주년이라고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말문을 열었다.
“전쟁이 남의 일이 아닌데 사람들 기억 속에는 잊혀져가고 있다는 게 이해할 수가 없다. 오래된 일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 원주캠퍼스 89학번인 이씨는 소위 말하는 ‘386세대’지만 지난해 6월 동시에 있었던 여중생 사망사건과 서해교전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당시 군인들을 치료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문을 하게됐다”며 “지나치게 북한에 대해 관대한 데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당시 군의관들은 나라를 지키다 숨져간 군인들에 대해 형식적인 보상에 그친 정부와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언론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
- 이봉기(32, 국군수도병원 내과 군의관) -
2002년 6월 29일 토요일. 나는 터키와의 월드컵 3, 4위전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 끝물의 애틋함이 괜히 섭섭해서 이런저런 월드컵 이야기를 동료들과 노닥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구내방송이 나오고 어수선한 분위기…. 이윽고, TV에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군수도병원 전 군의관을 비롯한 장병들은 퇴근을 미루고 대기상태로 남겨졌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낸 후 헬기를 통해서 환자들을 후송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필요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퇴근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날, 외과계 군의관들은 입대 이후 미증유의 수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내과 군의관들을 찾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귀가한 나를 아내와 뱃속의 아기가 반겼다. 점심식사를 하며 흘깃거리던 TV화면에는 사망자를 비롯해서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만삭인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나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쉽게 퇴근할 수 있었던 것이 찜찜하더라니….
‘내과를 찾을 일이 뭘까?’
이유인즉, 경상자 중에서도 배의 화재로 인한 연기로 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이 있어서 내과 군의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출근한 뒤 들어선 중환자실의 분주함은 수도병원 근무 후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중상자들이 즐비했고 팔다리를 잃은 장병들도 눈에 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 난리인가. 저 창창한 청춘들을 어찌 하라고….
화재에 의한 흡인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들을 봐주고 담당배정을 한 후 내 환자인 오중사의 몸에 박혀 미처 제거되지 않은 파편과 총알조각들을 손닿는 대로 마저 빼냈다. 14mm 기관총 탄두가 깨진 채로 등 뒤를 뚫고 들어가 방광을 찢고 사타구니 근처의 피부 밑에 묻혀 있었다. 피부를 절개하고 탄두를 끄집어내니 반 동강이 난 것이 어딘가에 부딪힌 후 튀어 들어간 듯 했다. 그나마 경상 축에 속하던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사뭇 처절했다.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 북쪽 배를 가로막고자 참수리 357호는 배의 옆구리로 적선의 진로를 막는 ‘차단기동’을 하고 있었다 한다. 차단기동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서로 간에 배의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피차간에 절대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니….
남하하던 북측 배가 방향을 틀며 옆으로 도는 순간 우리 장병들의 눈에는 포탑을 돌려 조준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보였다. ‘어, 쟤네들 왜 저래?’하는 순간 적의 85mm포가 불을 뿜었고 무척이나 가까이 붙어 있던 우리배의 함교(조타실)가 명중당했다. 이후 우리의 포탑들이 차례로 가격 당했다. 이때 함교와 포탑에 위치하던 장병들이 전사했다. 우리와 같은 전자조준장비도 없이, 수동으로 조준하는 북쪽 함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우리를 노리고 미리 공격계획을 가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앙 통제실인 함교가 무력화되고 대응 사격할 수 있는 포탑들이 날아간 상황에서 어려운 전투를 벌이게 됐고, 유명한 이야기지만 권모상병 같은 경우는 왼손이 날아간 상태에서 오른손만으로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투혼을 보였던 눈물나는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더욱 황당한 것은 피격당한 참수리 357호가 당하고 있는 동안 급히 접근한 참수리 358호에서 북측 경비정에 포탄을 퍼부어댔지만 그 상황에서도 북측 경비정은 오로지 357호만 공격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더 위협적인 상대를 먼저 공격해야하는 것이거늘, 침몰시키겠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인지 ‘난 한 놈만 패’식의 공격에 의해 357호는 결국 가라앉아 버린다. 당연히 북측 경비정은 옆에 있던 358호에 의해 신나게 두들겨 맞아서, 침몰되는 것만 겨우 면하고 퇴각하게 됐고 이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북측 사망자만 30명 이상이라 한다. 같은 민족끼리 내가 더 많이 죽였네, 겨루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가운데 오중사의 맞은 편 침상에서 생존자중 가장 많이 다친 박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쟤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중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포탄에 맞아 왼쪽 발목이 부서져 절단술을 끝낸 상태였고 그 옆에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발그레 부어오른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약혼자란다.
“우리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하는 의무병은 전투 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당시부터 쇼크 상태였고, 수술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지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 전공인 나도 박상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스완갠쯔 도자를 삽입하고 수액과 승압제로 혈압을 힘겹게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후송 시부터의 쇽에 의한 급성 신부전 때문에 신장내과 동료도 힘을 합해 혈액투석을 지속했고, 외상성 ARDS가 속발해 호흡기내과 동료도 합류한다. 방광손상이 발견돼 비뇨기과 동료도 합세하고, 부비동에 문제가 생겨 이비인후과 군의관도 손을 더했다. 건장했던 박상병은 다행히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그 가운데, 나는 테니스 친구, 술친구들에 다름 아니었던 동료군의관들이 실은 대단한 의사들이었음에 새삼스러워했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질펀한 세월을 뚫고 오면서 형편없이 메말라 버린 내 선량함에 박상병의 회생은 한통의 생수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관리의 기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균이 배양되면서 소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와지며 색이 죽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부위에서 절단이 이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른다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지 손실이 감정적 아쉬움에 그치는 사건은 아님을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픈 마음과 괜스런 죄책감을 그나마 생명이 지속된다는 사실로 슬그머니 달래 버렸다. 그렇게,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창에는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도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상병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바싹 말라버린 박상병은 정신을 차리면서 오히려 군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 사이에서 부서진 육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정신과 군의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지만, 그 역시 박상병의 망가진 육체와 앞으로 닥치게 될 고난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상병은 그렇게 회복돼 갔다. 그사이 오중사는 방광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로 옮겨지고, 부정장 이중위도 정형외과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박상병이 서해교전 환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휴가를 주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적 호사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따지자면, 6.25 동란, 경술국치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얻어진 휴가로 나는 아내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딸의 첫 모습을 대한 순간만큼은 광막한 우주 속에 나와 아이, 단 둘만 존재하는 감격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이 순전히 그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서도, 배냇짓을 하는 딸아이에게 풍덩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또 한달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박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상병은 완연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이틀 뒤, 가족들의 오열 속에 우리병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박병장(진급했다)은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충무무공훈장도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옴짝달싹 못하는 역사의 틀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인류사에 전쟁이 없어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다.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도 남이 일으키는 전쟁에 인생을 맡겨야 할 수도 있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바라본 전쟁은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저 멀리 서있다. 아득하게 멀지만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그의 섬뜩한 실루엣을 본다. 갖가지 대의명분으로 치장 해도 전쟁은 부서지는 육체와 영혼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 전장에서 맞닥뜨려야 할 맹목적인 폭력들. 그리고 잇따르는 수많은 이의 비극들. 이를 막기 위한 소위 ‘전쟁억지력’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더 많은 무기를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
그렇게 가을을 보내던 중 병원 앞 산책로에서 이중위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약혼녀를 만났다. 처음 중환자실에서 대하던 날의 우울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밝은 모습이었다. 이중위는 의족보행 연습을 시작한 뒤였고, 퇴원후 다시 해군으로 복귀해 사무직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예정대로 이뤄질 거란다.
삶은 계속되기에 여전히 아름답다.■
[당선소감] 이봉기(32, 국군수도병원 내과 군의관)
나는 글쓰기와 사진 찍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흐르는 시간에 희석돼버리는 기억을 보존하기에 그만한 도구를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의관 훈련을 마치고 가족을 떠나 철원 땅에 덩그러니 던져져 눈도 녹지 않은 봄날을 맞아야 했던 2000년 4월부터 나는 신변잡기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나중에 만든 홈페이지에(www.nicedr.com) 쓸어 담겼고, 해가 바뀌어 사막에 파병되는 경험을 하면서는 그 기록들도 급격히 몸집을 불리게 되었다. 질리도록 많은 경험과 개인사들이 전세계를 광속으로 돌아다니는 세상이지만, 내가 겪어낸 시간들에 유달리 애착이 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기에 끄적거리는 습관이 싫지 않다.
군의관과 공보의들의 유익한 여가활동 중 하나인 각종 행사 응모를 통해서 꿋꿋이 가산을 불려가던 중에(지난주 ‘강산에’ 콘서트는 영양만점이었다. 후훗~) 한미수필문학상 공고를 보게 됐다. 평상적인 업무환경이라면 도저히 접할 길이 없었을 서해교전 당시의 강렬했던 상황들을, 군의관이라는 신분이기에 경험해 버린 나는 소재를 고민할 이유가 없었고, 평소 멋대로 써 지르던 습관을 억누르면서 수필의 우아한 문체에 도전해 본 것이 덜컥 입상이 되어 쾌감보다는 황당함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몇 개월 후 전역을 앞둔 말 년차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겪은 변화 중 하나가 역설적이게도 ‘전쟁’을 더욱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험난한 육아과정을 거치고 힘겨운 입시지옥과 고민스런 사춘기를 통과하며 성장했을 소중한 아들들이 일개 전투에서조차 무력의 맹목에 사정없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폭력의 가장 거대한 형태인 전쟁이 보여줄 비참함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어서이다. 요즘 말도 많은 핵무기 같은 것이야 말로 분별없는 맹목성을 자랑한다. 이렇듯 존엄성과 휘발성의 양극단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인류의 일원이지만, 내게는 너무도 무거웠던 동혁이의 실존의 무게를 공감해 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 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충무무공훈장이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와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지난해 6월 29일에 발생한 ‘서해교전’ 1주년을 맞아 당시 부상장병들을 치료하며 그들을 옆에서 지켜봤던 한 군의관의 회고가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인터넷상에서 급속도로 번지고 있는 이 글은 읽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넘어 진한 아픔을 남기고 있다. 무엇을 주장하거나 어떤 의도를 가지고 쓴 글이 아니라 당시 자신이 겪었던 일들을 마치 일기를 쓰듯 담담하게 써내려간 이 글은 애국과 국가의 의미를 다시 한번 깨우치게 한다는 점에서 더욱 아픈 글이 되고 있다.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근무하면서 서해교전 부상 장병들을 치료한 이봉기(李鳳基·34)씨가 쓴 ‘서해교전…어느 군의관의 소고(小考)’라는 제목의 이 글은 원고지 30장 분량의 글이다. 이씨는 올 4월 전역해 현재 서울아산병원 심장내과 임상전문의로 근무하고 있다.
‘오 중사의 맞은편 침상에서 생존자 중 가장 많이 다친 박동혁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 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포탄을 맞아 왼쪽 발목을 절단한 부정장 이희완 중위 설명으로는 의무병이었던 박 상병은 여기저기에서 쓰러져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니다 위험에 고스란히 노출돼 그렇게 됐다는 것이었다.…’
이씨의 이 글은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지만 삶은 계속되며 여전히 아름답다’는 문장으로 끝을 맺는다. 의료전문지인 ‘청년의사’가 주최하는 ‘한미수필문학상’에서 장려상에 뽑힌 이씨의 글은 4월 청년의사 홈페이지에 처음 소개됐다.
이씨는 “올 2월쯤인가 청년의사 홈페이지에서 문학상을 개최한다는 광고를 봤는데 소재가 ‘환자와의 관계에서 가장 생각나는 일’로 돼 있어서 내 생애 평생 잊지 못할 당시 경험을 썼다”고 말했다.
서해교전 1주년을 앞둔 22일 서울아산병원에서 만난 이씨는 파란 수술복 차림으로 당직근무를 서고 있었다. 서해교전 1주년이라고 이야기를 꺼내자 그는 말문을 열었다.
“전쟁이 남의 일이 아닌데 사람들 기억 속에는 잊혀져가고 있다는 게 이해할 수가 없다. 오래된 일도 아니고…”라고 말했다.
연세대 의대 원주캠퍼스 89학번인 이씨는 소위 말하는 ‘386세대’지만 지난해 6월 동시에 있었던 여중생 사망사건과 서해교전에 대해 할 말이 많았다.
“당시 군인들을 치료하면서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존재가 누구인가에 대한 자문을 하게됐다”며 “지나치게 북한에 대해 관대한 데 대해서는 이해할 수 없다”고 말했다. 이씨는 “당시 군의관들은 나라를 지키다 숨져간 군인들에 대해 형식적인 보상에 그친 정부와 이를 제대로 보도하지 못한 언론에 깊은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황진영기자 buddy@donga.com
유진아, 네가 태어나던 해에 아빠는 이런 젊은이를 보았단다
- 이봉기(32, 국군수도병원 내과 군의관) -
2002년 6월 29일 토요일. 나는 터키와의 월드컵 3, 4위전을 앞두고 축제 분위기 끝물의 애틋함이 괜히 섭섭해서 이런저런 월드컵 이야기를 동료들과 노닥거리며 퇴근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웬걸, 갑자기 구내방송이 나오고 어수선한 분위기…. 이윽고, TV에서는 연평도 앞바다에서 양측 해군 간에 교전이 있었다는 보도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국군수도병원 전 군의관을 비롯한 장병들은 퇴근을 미루고 대기상태로 남겨졌고, 그렇게 한 시간 정도를 보낸 후 헬기를 통해서 환자들을 후송 중이라는 소식이 들리는 가운데 필요 인원만 남기고 나머지는 퇴근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날, 외과계 군의관들은 입대 이후 미증유의 수고를 했음은 물론이다. 내과 군의관들을 찾지 않음을 다행으로 여기며 귀가한 나를 아내와 뱃속의 아기가 반겼다. 점심식사를 하며 흘깃거리던 TV화면에는 사망자를 비롯해서 많은 부상자들이 발생했다는 뉴스가 흐르고 있었다.
다음날인 일요일 아침. 만삭인 아내와 함께 아침식사를 하던 나는 병원에서 온 전화를 받았다. 어쩐지 쉽게 퇴근할 수 있었던 것이 찜찜하더라니….
‘내과를 찾을 일이 뭘까?’
이유인즉, 경상자 중에서도 배의 화재로 인한 연기로 폐 손상을 입은 환자들이 있어서 내과 군의관의 손길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출근한 뒤 들어선 중환자실의 분주함은 수도병원 근무 후 처음 접하는 광경이었다. 응급수술을 마치고 누워있는 중상자들이 즐비했고 팔다리를 잃은 장병들도 눈에 띈다. 콧등이 시큰거렸다. 평화로운 대한민국에서 이게 웬 난리인가. 저 창창한 청춘들을 어찌 하라고….
화재에 의한 흡인손상이 의심되는 환자들을 봐주고 담당배정을 한 후 내 환자인 오중사의 몸에 박혀 미처 제거되지 않은 파편과 총알조각들을 손닿는 대로 마저 빼냈다. 14mm 기관총 탄두가 깨진 채로 등 뒤를 뚫고 들어가 방광을 찢고 사타구니 근처의 피부 밑에 묻혀 있었다. 피부를 절개하고 탄두를 끄집어내니 반 동강이 난 것이 어딘가에 부딪힌 후 튀어 들어간 듯 했다. 그나마 경상 축에 속하던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사뭇 처절했다.
북방한계선을 넘어 남쪽으로 계속 내려오는 북쪽 배를 가로막고자 참수리 357호는 배의 옆구리로 적선의 진로를 막는 ‘차단기동’을 하고 있었다 한다. 차단기동이 무시무시한 이유는 서로 간에 배의 옆구리를 고스란히 노출시키게 된다는 점이다. 이건 피차간에 절대 공격하지 않으리라는 믿음을 전제로 한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으니….
남하하던 북측 배가 방향을 틀며 옆으로 도는 순간 우리 장병들의 눈에는 포탑을 돌려 조준하고 있는 인민군들이 보였다. ‘어, 쟤네들 왜 저래?’하는 순간 적의 85mm포가 불을 뿜었고 무척이나 가까이 붙어 있던 우리배의 함교(조타실)가 명중당했다. 이후 우리의 포탑들이 차례로 가격 당했다. 이때 함교와 포탑에 위치하던 장병들이 전사했다. 우리와 같은 전자조준장비도 없이, 수동으로 조준하는 북쪽 함정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이는 우리를 노리고 미리 공격계획을 가진 상태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중앙 통제실인 함교가 무력화되고 대응 사격할 수 있는 포탑들이 날아간 상황에서 어려운 전투를 벌이게 됐고, 유명한 이야기지만 권모상병 같은 경우는 왼손이 날아간 상태에서 오른손만으로 M60 기관총을 발사하는 투혼을 보였던 눈물나는 전투는 이렇게 시작됐다. 더욱 황당한 것은 피격당한 참수리 357호가 당하고 있는 동안 급히 접근한 참수리 358호에서 북측 경비정에 포탄을 퍼부어댔지만 그 상황에서도 북측 경비정은 오로지 357호만 공격했다는 것이다. 상식적으로 더 위협적인 상대를 먼저 공격해야하는 것이거늘, 침몰시키겠다고 작정을 했던 모양인지 ‘난 한 놈만 패’식의 공격에 의해 357호는 결국 가라앉아 버린다. 당연히 북측 경비정은 옆에 있던 358호에 의해 신나게 두들겨 맞아서, 침몰되는 것만 겨우 면하고 퇴각하게 됐고 이후 들리는 이야기로는 북측 사망자만 30명 이상이라 한다. 같은 민족끼리 내가 더 많이 죽였네, 겨루는 것은 또 다른 비극이지만, 그래도….
그렇게 오전을 보낸 가운데 오중사의 맞은 편 침상에서 생존자중 가장 많이 다친 박 상병을 접하게 된다. 건장하고 준수한 청년이었는데 의식은 없었고 인공호흡기가 달려 있었으며, 내가 군대온 이래로 목격한 가장 많은 기계와 약병들을 달고 있는 환자였다. 파편이 배를 뚫고 들어가서 장을 찢었고, 등으로 파고 들어간 파편은 등의 근육과 척추에 박혀있었으며, 등과 옆구리는 3도 화상으로 익어 있었다. 오른쪽 허벅지에도 길쭉한 파편이 박히고, 전신에 총상과 파편창이 즐비했다.
“쟤는…, 왜 저렇게 다쳤어요?”
옆 침상에 누워 있던 부정장 이중위가 입을 열었다. 그는 포탄에 맞아 왼쪽 발목이 부서져 절단술을 끝낸 상태였고 그 옆에는 한참을 울었는지 눈이 발그레 부어오른 젊은 아가씨가 앉아 있었다. 약혼자란다.
“우리배의 의무병 녀석인데 부상자들 처치한다고 몸을 아끼지 않고 뛰어다니다가 그랬습니다….”
참수리 357호의 의무병이었던 박상병은 첫 포탄에 조타실이 깨지면서 파편에 쓰러진 정장 윤영하 대위를 몸으로 덮고 함교 계단 아래로 끌고 내려가 심폐소생술을 시도했으나, 방탄조끼 밑으로 줄줄 흐르는 핏물을 보며 소용없음을 깨닫고는 다시 나가 쓰러지는 전우들을 치료하기 위해 몸을 숨기지 않고 뛰어다녔다. 당연히, 총을 쏘는 전투병은 엄폐물에 몸을 숨긴 채로 사격을 하게 마련이지만, 부상병을 찾아 이동해야하는 의무병은 전투 시 가장 위험한 처지에 놓이는 것이다. 총탄에는 눈이 없다.
이야기를 듣자 울컥했다. 멋진 놈…. 그런데, 이게 뭐냐.
상태는 굉장히 안 좋았다. 출혈이 엄청나서 후송당시부터 쇼크 상태였고, 수술하는 동안에도 엄청난 양의 수혈이 필요했다. 정형외과와 외과 군의관들이 달려들어 가능한 대로 파편과 총탄을 제거하고, 장루를 복벽으로 뽑고, 부서진 오른쪽 허벅지의 혈관을 이어놓은 상태였다. 엄청난 외상으로 인한 전신성 염증반응 증후군(SIRS)으로 인해 혈압이 쉽사리 오르지 않아 결국, 순환기내과 전공인 나도 박상병과 인연을 맺게 된다. 스완갠쯔 도자를 삽입하고 수액과 승압제로 혈압을 힘겹게 유지해 나가는 가운데, 후송 시부터의 쇽에 의한 급성 신부전 때문에 신장내과 동료도 힘을 합해 혈액투석을 지속했고, 외상성 ARDS가 속발해 호흡기내과 동료도 합류한다. 방광손상이 발견돼 비뇨기과 동료도 합세하고, 부비동에 문제가 생겨 이비인후과 군의관도 손을 더했다. 건장했던 박상병은 다행히도 질긴 생명력을 보여주었고, 그 가운데, 나는 테니스 친구, 술친구들에 다름 아니었던 동료군의관들이 실은 대단한 의사들이었음에 새삼스러워했다.
‘너는 반드시 살려낸다!’
박상병의 숭고했던 행동을 여러모로 전해들은 우리 군의관들은 암묵적으로 동감하고 있었다. 이기심으로 질펀한 세월을 뚫고 오면서 형편없이 메말라 버린 내 선량함에 박상병의 회생은 한통의 생수가 되어 줄 것만 같았다. 뭔가 해줄 수 있다는 것…. 레지던트 기간 동안 수없이 지새워냈던 하얀 밤들과 바꿔낸 중환자관리의 기술이 너무나도 기꺼웠다. 하지만, 감염부위에서 녹농균과 메치실린 내성 포도상 구균이 배양되면서 소위 항생제의 마지막 보루라 일컬어지는 이미페넴, 반코마이신, 아미카신으로 배수진을 치게 됐다. 오르내리는 체온에 일희일비하는 가운데 전신상태는 조금씩 호전되고 있었지만 오른쪽 다리가 서서히 차가와지며 색이 죽기 시작했다. 부서졌던 혈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결국, 고관절부위에서 절단이 이뤄졌고, 사타구니 아래쪽 오른다리는 그렇게 사라졌다. 사지 손실이 감정적 아쉬움에 그치는 사건은 아님을 누구나가 알고 있었지만, 다른 길이 없었다. 아픈 마음과 괜스런 죄책감을 그나마 생명이 지속된다는 사실로 슬그머니 달래 버렸다. 그렇게, 3주를 지내며 더 이상의 발열도 없었고 등과 옆구리 화상부위 및 관통창에는 발간 육아조직이 자라고 있었다. 수술부위의 상처들도 자리가 잡혔다. 인공호흡기도 멈췄고, 기도절개를 미루며 버텨오던 기도관도 제거했다. 박상병이 말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사이 바싹 말라버린 박상병은 정신을 차리면서 오히려 군의관들을 힘들게 했다. 현실을 서서히 깨닫게 되면서 차오르는 불안과 공포와 절망감을 입으로 표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주렁주렁 매달린 약병 사이에서 부서진 육체로 꼼짝 못하고 누워 흐느끼는 젊은 장정을 바라보는 일은 너무나도 불편했다. 정신과 군의관이 나서서 도움을 주었지만, 그 역시 박상병의 망가진 육체와 앞으로 닥치게 될 고난을 대신해 줄 수 없음은 그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어쨌든 박상병은 그렇게 회복돼 갔다. 그사이 오중사는 방광수술을 위해 비뇨기과로 옮겨지고, 부정장 이중위도 정형외과 일반병실로 옮겨졌다. 박상병이 서해교전 환자들 중 가장 늦게 중환자실을 빠져나와 외과병동으로 옮겨지게 됐다. 가장 위중했던 그의 회복으로 서해교전으로 인한 전투 시의 사망자 외 추가 사망자는 단 한명도 나오지 않았고, 이에 고무된 병원 측은 수고한 군의관들에게 포상으로 위로휴가를 주었다. 많은 젊은이들에게 고통스러운 사건에서 파생된 개인적 호사여서 마음이 불편했지만, 내가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라며 자위를 했다. 따지자면, 6.25 동란, 경술국치까지도 거슬러 올라가야 할 일이라고…. 그렇게 얻어진 휴가로 나는 아내의 출산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든 내 딸의 첫 모습을 대한 순간만큼은 광막한 우주 속에 나와 아이, 단 둘만 존재하는 감격이었다. 그 때까지 내 삶이 순전히 그 순간을 위한 것이라 해도 아깝지 않을 것 같았다. 다시금 현실로 돌아와서도, 배냇짓을 하는 딸아이에게 풍덩 빠져 한참을 허우적거리는 사이에 또 한달 정도가 흘렀다.
어느 날, 박상병이 다시 중환자실로 내려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의식이 나빠져 CT를 찍어보니 뇌실질 전반에 걸친 세균감염이 의심된다는 것이었다. 예의 배수진용 항생제들은 계속 사용되던 중이었고, 중환자실에서 다시 만난 박상병은 완연히 수척해진 모습으로 인공호흡기와 약병들에 또다시 생명을 매달고 있었다. 새로 개발된 항생제들을 민간에서 구매해서 사용하기도 해봤지만 패혈성 쇼크가 이어지며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결국 9월 20일 금요일 새벽에 젊은 심장은 마지막 박동을 끝냈다. 이틀 뒤, 가족들의 오열 속에 우리병원에서 영결식이 거행되고 박병장(진급했다)은 대전국립묘지에 묻혔다. 충무무공훈장도 수여됐다. 하지만 그는 꿈꿔왔을 나머지 인생을 하늘로 가져가야 했고, 그의 부모님은 아들을 잃었다. 그를 만났던 군의관들의 가슴에도 구멍이 났다.
옴짝달싹 못하는 역사의 틀 속에서 내가 어찌할 수 없는 노릇이고, 인류사에 전쟁이 없어지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한 선량한 젊은이의 아까운 죽음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일은 말할 수 없는 무력감을 안겨줬다. 나도, 내 주위의 사람들도 남이 일으키는 전쟁에 인생을 맡겨야 할 수도 있는 초라한 존재일 뿐이었다. 군의관 생활을 하면서 바라본 전쟁은 더욱 두려운 모습으로 저 멀리 서있다. 아득하게 멀지만 언제 달려들지 모르는 그의 섬뜩한 실루엣을 본다. 갖가지 대의명분으로 치장 해도 전쟁은 부서지는 육체와 영혼을 제물로 삼아야 한다. 전장에서 맞닥뜨려야 할 맹목적인 폭력들. 그리고 잇따르는 수많은 이의 비극들. 이를 막기 위한 소위 ‘전쟁억지력’을 키우기 위해 수많은 젊은이들을 군인으로 만들고, 더 많은 무기를 갖춰야 하는 또 다른 아이러니….
그렇게 가을을 보내던 중 병원 앞 산책로에서 이중위와 그의 휠체어를 밀고 있는 약혼녀를 만났다. 처음 중환자실에서 대하던 날의 우울했던 첫인상이 무색하게도 그들은 밝은 모습이었다. 이중위는 의족보행 연습을 시작한 뒤였고, 퇴원후 다시 해군으로 복귀해 사무직에서 복무할 예정이었다. 그들의 결혼도 예정대로 이뤄질 거란다.
삶은 계속되기에 여전히 아름답다.■
[당선소감] 이봉기(32, 국군수도병원 내과 군의관)
나는 글쓰기와 사진 찍기를 무척이나 좋아한다. 흐르는 시간에 희석돼버리는 기억을 보존하기에 그만한 도구를 아직까지는 발견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군의관 훈련을 마치고 가족을 떠나 철원 땅에 덩그러니 던져져 눈도 녹지 않은 봄날을 맞아야 했던 2000년 4월부터 나는 신변잡기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이것들은 나중에 만든 홈페이지에(www.nicedr.com) 쓸어 담겼고, 해가 바뀌어 사막에 파병되는 경험을 하면서는 그 기록들도 급격히 몸집을 불리게 되었다. 질리도록 많은 경험과 개인사들이 전세계를 광속으로 돌아다니는 세상이지만, 내가 겪어낸 시간들에 유달리 애착이 가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기에 끄적거리는 습관이 싫지 않다.
군의관과 공보의들의 유익한 여가활동 중 하나인 각종 행사 응모를 통해서 꿋꿋이 가산을 불려가던 중에(지난주 ‘강산에’ 콘서트는 영양만점이었다. 후훗~) 한미수필문학상 공고를 보게 됐다. 평상적인 업무환경이라면 도저히 접할 길이 없었을 서해교전 당시의 강렬했던 상황들을, 군의관이라는 신분이기에 경험해 버린 나는 소재를 고민할 이유가 없었고, 평소 멋대로 써 지르던 습관을 억누르면서 수필의 우아한 문체에 도전해 본 것이 덜컥 입상이 되어 쾌감보다는 황당함이 앞서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몇 개월 후 전역을 앞둔 말 년차 군의관으로 복무하며 겪은 변화 중 하나가 역설적이게도 ‘전쟁’을 더욱 무서워하게 된 것이다. 험난한 육아과정을 거치고 힘겨운 입시지옥과 고민스런 사춘기를 통과하며 성장했을 소중한 아들들이 일개 전투에서조차 무력의 맹목에 사정없이 희생당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폭력의 가장 거대한 형태인 전쟁이 보여줄 비참함을 어느 정도 짐작하게 되어서이다. 요즘 말도 많은 핵무기 같은 것이야 말로 분별없는 맹목성을 자랑한다. 이렇듯 존엄성과 휘발성의 양극단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인류의 일원이지만, 내게는 너무도 무거웠던 동혁이의 실존의 무게를 공감해 주는 이들이 있다면 그저 고마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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