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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의사Editor's Note] 의사와 파일럿의 공통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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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충훈
댓글 0건 조회 3,613회 작성일 03-05-14 00:00

본문

- [Editor's Note] 의사와 파일럿의 공통점
<주간 - 169> 2003-05-12


최근에 유명 시나리오 작가 한 분과 만날 일이 있었다. 원래 친분이 있는 분인데다가 매우 오랜만에 만난 것이라, 우리가 주고받은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주로 어떻게 인생을 즐길 것인가 하는) 대화들과 아주 많은 술잔이었다.

이런 저런 이야기들 중에 그분이 자신의 처남 이야기를 꺼냈다. 모 민간 항공사 소속의 파일럿인 처남이 매우 부럽다는 것이 골자였다. 비교적 높은 연봉을 받고 여유 시간이 많은 편이고 세계 곳곳을 공짜로 여행할 수 있다는 장점을 누린다는 것도 부러운 이유들이지만,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별로 하는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파일럿이 하는 일이 별로 없다는 말이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하니, 그분은 처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옮기기 시작했다. “요즘은 워낙 모든 것이 컴퓨터에 의해 자동으로 작동되기 때문에, 파일럿이 하는 일이라곤 ‘열쇠 꽂아서 시동 걸고, 시동 끄고 열쇠 뽑는 것뿐’이라더라. 비행시간 내내 승무원들하고 잡담이나 하며 보낸다더라.”

물론 많이 부풀려진 말일 게다. 정기적으로 매우 까다로운 건강검진을 통과해야 하고, 수백 개에 달하는 계기판을 체크해야 하고, 지극히 불규칙한 생활을 견뎌야 하는 스트레스는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열심히 맞장구를 치며 파일럿을 부러워했다. 어쨌거나, 앞에 나열한 장점들 또한 사실이기 때문이다.

잠시 후 다른 곳으로 화제가 옮아갔는데, 이번에는 병원 이야기였다.

“우리 애가 감기에 걸려서 동네 소아과엘 갔는데 말야, 의사가 아이를 진찰한 다음에 갑자기 나에게 잠깐 앉아 보라는 거야. 얼굴 색이 이상하다나 뭐라나. 나는 멀쩡했으니까, 이 양반이 무슨 사기를 치려고 이러나 생각했지. 근데, 의사가 아주 심각한 얼굴로 피검사를 해 보자고 하더라구. 나중에 보니까 간 수치가 천이 넘게 나온 거야. 30이 정상이래매?”

대충 추론해 보니 원인이 명확하지 않은 급성 전격성 간염이었던 듯했다. 그분은 큰 병원으로 전원되어 2주 가량 입원 치료를 받았고, 다행히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다.

“죽을 뻔한 거라던데, 사실이냐?”

그분은 농담처럼 이야기했지만, 자신이 상상조차 못했던 숨은 질병을 찾아낸 그 의사의 예리함에 대한 놀라움과 고마움이 가득 담긴 목소리였다. 최근의 일이라 아직 변변히 사례도 못했다며, 언젠가 시간을 내서 한번 찾아가야겠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어쨌든 건강이 회복되어 다행이라고, 벌써 40대 중반이니 앞으로는 건강에도 신경 좀 쓰라고 말하던 중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의사와 파일럿 사이에 공통점이 꽤 있다는 사실이다. 매우 긴 시간을 투자해야 하고 늘 새로운 것을 공부해야 한다는 점, 높은 소득을 올린다는 점, 작은 실수가 다른 사람의 생명을 앗아갈 수 있기 때문에 철두철미해야 한다는 점. 그리고 매우 중요한 공통점 하나 더. 언뜻 보기에는 별로 어렵지도 대단하지도 않아 보이는 일을 하지만, 결정적인 순간에는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중요한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점.

특히 일차 진료를 담당하는 의사가 ‘주로’ 하는 일은 어깨너머로 대충 배우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처럼 보인다. 머리가 아프면 두통약 주고 배가 아프면 소화제 주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어 보이고, 실제로 ‘의사 흉내’를 곧잘 내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평범한 두통과 뇌종양에 의한 두통을 가려내는 일, 단순한 속쓰림과 위암에 의한 증상을 가려내는 일은 분명 아무나 못한다. 99명의 가벼운 환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1명의 위중한 환자를 찾아내는 일이 어쩌면 더 어려운 일이다. 마치 파일럿이 평소에는 시동이나 켜고 끄더라도 기체 이상이나 기상 악화 등의 위기 상황이 닥쳤을 때 진가를 발휘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그분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했고, 그분도 전적으로 공감했다. 그리고 파일럿에게, 또 의사들에게 이 사회가 기꺼이 정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데에 동의했다.

상대가 유명 시나리오 작가였으니, 나는 여기서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의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단순히 직업 설정만 의사인 것이 아니라 의사로서의 삶의 모습이 치열하게 드러나는 작품을 하나 써 보시라고 말이다. 내용만 좋으면 아마 의사협회에서도 적극적으로 지원을 할 것이다, 나라도 나서서 의사들 상대로 투자유치를 받아보겠다, 비정상적으로 멀어진 의사와 국민 사이를 좀 가깝게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다, 등등의 감언이설도 늘어놓았다.

그분은 그저 빙그레 웃을 뿐이었지만, 정말 그런 영화 한편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내 마음은 무척이나 간절했다.

박재영 편집국장 medicaljourn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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